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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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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우리나라 최대의 휴양지는 아름다움이 숨쉬는 섬, 제주도 입니다. 모든 것들이 생기 넘칠 것만 같은 아름다운 이곳이지만, 이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다. 당시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사라졌고, 모든 것은 천천히 죽어갔다. 무려 제주도 사람의 1/3이 차가운 주검이 되었고, 시체 썩는 냄새는 온 섬을 뒤덮었다. 1795년에 제주도에 들이 닥친 살인적이 가뭄이 만들어 냈던 전대미문의 아사 사건이었다. 아사란 굶어 죽는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제주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질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당시 나라의 통치자였던 정조는 급히 어명을 재려, 제주도 백성을 구제할 구휼미를 보낸다. 하지만 쌀을 실은 대부분으 배가 제주도에 채 닿..
안중근 오늘의 이야기는 안중근 선생님에 대해서 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사죄한다. 이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1939년 경성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공양하는 사찰에 찾아와 안주근의 행적을 사죄하는 의문의 조선인 남자가 있었다. 원래는 을미사변 때 순국한 조선인들을 모시기 위한 재단이었으나 일제가 개조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공양하는 사찰로 만들어 버린 곳이 바로 서울의 박문사이다. 그의 일은 곧 당시 신문에 대서 특보된다. 1939년 10월 16일 경성일보에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 앞에서 안중근을 대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사죄했다라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같은 신문에 실렸던 또 다른 기사 하나에는 그는 사찰 방문 후 이토의 아들을 찾아가 그에게 안중근의 행도을 깊이 사..
인천상륙작전 자네들의 목숨은 그 누구도 보장해줄 수 없을 것이다.부디 그대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꼐하길 바란다. 1950년 전쟁 발발 2개월이 지난 8월 어느 날, 서해의 섬 영흥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이 섬의 백사장으로 의문의 사내 17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진행된 그들의 상륙이었다.섬에 발을 내딛자 마자 섬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밀물과 썰물 등 마닷물의 움직임을 정밀히 기록하는가 하면 섬과 바다를 넘나들며 의심스러운 행보를 보인 그들은 수상한 행보를 계속하였다. 무려 한달 간이나 계속된 그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우리가 잊어버린 그날의 영웅들에 대해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1950년 9월 15일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꿔 놓았던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은 모두가 반대했..
허준 허준에 대해서 대화형식으로 글을 작성해 보았으니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글쓴이 : 와 허준 영감님, 정말 뵙고 싶었습니다.허준 영감님 : 본인이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그렇게 먼 곳에서까지 찾아 오고 그러시나.글쓴이 : 헐, 영감님, 무슨 말씀이십니까. 혹시 그 동의보감은 미래에 한국에서는 모르는 사람은 절대 없을 것입니다.허준 영감님 : 이 책이 그렇게 인기가 많고 알려지게되서 뿌듯하구만 그려.글쓴이 : 그 뿐만이 아니고 허준 영감님이 생각하시는 것보다 저희들은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바로 드라마 허준 덕분입니다.허준 영감님 : 오 그렇다면 설마 내가 주인공인 판소리였단 말이오?글쓴이 : 음, 뭐 비슷한 거긴 합니다. 정말 대단했었습니다. 저희는 허준 영감님의 인생을 보고 정말 많은 것을 느꼈습니..
노근리 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해서 적어보겠다. 그날, 왼쪽 눈알이 빠졌다. 얼굴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이제는 겨울도 보지 않는다.그날, 얼굴의 반이 없어졌다. 이제 외출은 꿈도 못 꾼다.그날, 한 아기의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여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던 엄마도 가슴이 뚫린 채로 죽고 말았다. 1950년 7월 그날, 그곳에서 300여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다.자식을 죽인 아버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 어린 아이, 노인들까지 모두 다 죽었다.누군가는 감추었고, 누군가는 잊었던 그날의 기억이다.이것은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피란 중 북한군에게 민간인이 몰살당한 안타까운 사건이라고만 알려졌던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이후 우리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
박열 박열 3탄. 피고인 박열, 후미꼬에게 사형을 선고한다.-1926년 3월 25일- 판사의 이유 모를 방청객 퇴출과 일본의 재판 방해 등 지금도 재판 기록을 완전히 공개하지 않을 만큼 의혹이 가득했던 재판의 결과는 결국, 사형이었다.하지만 끝까지 당당함을 잃지 않았던 조선의 청년 박열은 재판장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를 한다.재판장 수고 많았네, 내 육체야 자네들 마음대로 한다만 내 정신이야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일본의 재판 결과에 어떤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던 그였지만, 그런 그도 도저히 견딜 수 없던 것은 바로 후미꼬와의 이별이었다.그렇게 둘은 혼인을 올린 지 며칠 만에, 서로 다른 교도로로 수감돼 다시는 만나지 못할 이별을 한 채 죽음만을 기다리게 된다.하지만 의혹이 가득했던 재판에 대한 여론을 의식해서인..
박열 박열 제2탄입니다. 1부에 이어서 재밌게 보시기 바랍니다. 연인으로, 때론 함께 조선의 독립을 꿈꾸는 독립운동가로서 둘만의 사랑을 키워나갔다.그들은 함깨 항일 단체를 조직하고 일본 열도를 발칵 뒤집어 놓을 만한 의거를 준비한다.그것은 바로 일왕 암살이었다.하지만 일왕을 암살하기 위한 폭탄을 동경에 반입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몇 번의 시도를 꾀했지만 번번이 실패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길 때쯤 사건이 터졌다.일본 관동 대지진이 발생해 40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던 것이다.이는 치안 유지를 명목으로 일본 내 조선인에 대한 체포와 감시를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설상가상으로 많은 조선인들이 말도 안 되는 명분으로 체포되는 상황이 일어나게 된다.박열과 후미꼬 또한 예외일 수 없었다.평소 그들을 눈여겨..
박열 가혹한 고문으로 죄수들의 비명이 끊이 지 않기로 유명했던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1926년 3월 12일에 한 쌍의 남녀 혼인식이 진행되었다.이곳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하지만 그날 실제로 그곳에서 한 쌍의 부부가 결혼식을 올렸다.그렇지만 화려한 웨딩드레스도, 하객도 없이 단지 혼인신고서에 서로의 도장을 찍으며 이루어진 보잘것없는 그들만의 결혼이었을 뿐이다.그 두 주인공은 박열과 후미꼬이다.후미꼬는 평소에 조선인 유학생들과 자주 교류하던 일본인 여성이다.그녀가 어느 날 한 조선인 청년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이유는 그의 외모도, 그의 성격도, 그의 능력 때문도 아니었다.바로 한 편의 시 때문이었다. 나는 개새끼로소이다.하늘을 보고 짖는달을 보고 짖는보잘것없는 나는개새끼로소이다.높은 양반의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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