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근리 학살 사건에 대해서 적어보겠다.
그날, 왼쪽 눈알이 빠졌다. 얼굴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아서 이제는 겨울도 보지 않는다.
그날, 얼굴의 반이 없어졌다. 이제 외출은 꿈도 못 꾼다.
그날, 한 아기의 아버지는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여야만 했다.
그리고 그날, 우는 아이에게 젖을 물리려던 엄마도 가슴이 뚫린 채로 죽고 말았다.
1950년 7월 그날, 그곳에서 300여 명의 죄 없는 사람들이 그렇게 죽었다.
자식을 죽인 아버지, 아이에게 젖을 먹이던 어머니, 어린 아이, 노인들까지 모두 다 죽었다.
누군가는 감추었고, 누군가는 잊었던 그날의 기억이다.
이것은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이다.
피란 중 북한군에게 민간인이 몰살당한 안타까운 사건이라고만 알려졌던 노근리 민간인 학살 사건은 이후 우리 모두를 충격에 빠뜨리는 진실이 밝혀졌다.
그날의 학살자는 북한이 아니었다. 그들은 바로 미군이었다.
미군들이 주민들을 대피시켜 주겠다며 접근해왔다.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북한군을 피해 피란중이었던 민간인에게 다가온 한 무리의 미군들이었다.
공포에 떨던 300여 명의 민간인, 구세주를 만난 듯 기뻐했다. 미군이 누구인가? 대한민국 국군을 도와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참전한 든든한 나라였다.
주민들은 모두 살았다고 기뻐하고 안심하였다.
그런데 쾅하는 소리가 울렸다. 눈 깜짝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미군과 동행하던 피란민에게 떨어진 포탄 한 발은 북한군의 전투기가 아니라 미군의 전투기였다.
이어서 여러 발의 포탄이 다시 피란민을 향해 떨어졌다. 정확히 피란민에게만 폭탄이 떨어졌다. 실수나 오발탄이 아니었다.
살점이 날리고, 피가 튀기는 아비규환이었다.
폭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은 자들은 미군이 왜 자신들을 공격하는지 생각해 볼 틈도 없이 달려야 했다.
단지 살기위해서 그렇게 그들은 달렸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어두운 쌍굴로 달렸다.
모두가 쌍굴로 몸을 피하자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이 울려 퍼졌던 폭음은 잦아들기 시작했다.
대체 왜 미군이 우릴 쏘았을까?
폭격이 멈추자 시작된 무차별 사격, 수 십 수백 발의 총이 쌍굴을 향해 사정없이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숨어든 모든 사람들을 뚫어 버릴 듯이 날아든 총알들에 많은 사람들이 죽었다.
그 총성은 3일간 멈추지 않고 계속 되었다.
그날 미군에게 주어졌던 임무는 모두를 죽이는 것이었다.
쌍굴 속 작은 소리에도 총알은 날아들었다.
어두컴컴했던 터널, 자신에게 튀는 피가 자신의 것인지 가족의 것인지 알 수 없던 공포의 3일 이었다.
우는 아기를 어찌할 줄 모르던 아버지는 살기 위해 자신의 아이를 스스로 죽여야 했고, 배고픔에 우젖은 아이를 달래기 위해 고개를 들었던 어머니는 날아오는 총알에 죽었다.
사망자는 200명에서 300명에 달하였다.
생존인원은 20여명, 너무도 충격적인, 믿기 힘든 그날의 기억이다.
그런데 지금 그날의 일을 기억하는 이는 찾아 보기 힘들다.
시간이 흘러 어렵사리 모인 생존자들이 미국을 상대로 배상을 요구하는 재판을 신청했지만 미국은 북한 소행으로 일관하며 재판을 기각해 버렸다.
대한민국 국민들의 작은 관심이라도 바라며 이야기를 담아 책을 내기도 했지만 그들만의 몸부림일 뿐이었다.
그 어떤 노력에도 그들을 기억해 주는 사람은 없었고, 그렇게 그날의 기억은 모두의 기억속에서 사라져 갔다.
그러던 어느날, 미국을 충격에 빠뜨렸던 사건이 발생한다.
1999년, 미국 AP통신의 끈질긴 추적 끝에 비밀 해체된 군사 기밀 문서에서 노근리 학살 사건의 증거가 발견된 것이다.
이 사건은 미국 신문 1면에 대서 특필되었고, 전 세계에 그 진실이 밝혀졌다.
미군이 받았던 피란민 학살 명령은 그들 중 북한군이 숨어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진실이 밝혀지자 미국은 배상을 제안하며 생존자들에게 접근했다. 그러나 유족들은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생존자들이 진정으로 원했던 진심 어린 사과를 동반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미군의 소행은 인정하지만 전쟁 중 일어난 불가피한 사건이었다는 식의 답변이었다.
미국은 사과가 아닌 유감만 표명했을 뿐이었다.
우린 미국의 배상을 거부했습니다. 그건 돌아가신 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그 이후 미국은 물론이거니와 우리나라에서조차 그와 관련된 어떤 후속 조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다 뿔뿔히 흩어지고, 이젠 생존자들도 진짜 얼아 없습니다.
오랜 시산에 걸쳐 영화까지 제작되며 노근리 사건을 기억하려는 노력이 이어지고 있지만 여전히 우리들에게 그날의 사건은 낯설게만 느껴질 뿐이다.
하지만 이제는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 출처 : 피키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