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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인천상륙작전

by Wa_rranty 2017. 2.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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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들의 목숨은 그 누구도 보장해줄 수 없을 것이다.

부디 그대들에게 신의 가호가 함꼐하길 바란다.


1950년 전쟁 발발 2개월이 지난 8월 어느 날, 서해의 섬 영흥도로 뜨거운 햇볕이 내리쬐는 이 섬의 백사장으로 의문의 사내 17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누구도 알아채지 못할 만큼 은밀하게 진행된 그들의 상륙이었다.

섬에 발을 내딛자 마자 섬 주변을 샅샅이 살피고, 밀물과 썰물 등 마닷물의 움직임을 정밀히 기록하는가 하면 섬과 바다를 넘나들며 의심스러운 행보를 보인 그들은 수상한 행보를 계속하였다.


무려 한달 간이나 계속된 그들은 도대체 누구였을까?


우리가 잊어버린 그날의 영웅들에 대해서 얘기해 보도록 하겠다.

1950년 9월 15일 대한민국의 운명을 바꿔 놓았던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상륙작전은 모두가 반대했던 작전이었다. 그 이유는 1/5000이라는 말도 안 되는 성공 확률 때문이었다.


쉽계 예측이 어려운 서해 바다의 움직임, 서울을 점령하고 있는 북한군의 방어 상태, 적군이 심어놓았을 바다 속 기뢰의 위치 등 모든 것이 불명확한 상황에서의 당연한 확률이었다.


이러한 악조건들을 뚫기 위해서 무엇보다 필요했던 것은 바로 정보였다.

하지만 첩보작전을 펼쳐야 하는 미군들은 우리말과 한국의 지리적 특징을 전혀 알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이에, 우리나라 군인들로 결성된 첩보 부대가 만들어진다. 17인의 결사대, 해군첩보부대였다.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인천으로 가기 위한 길을 여는 것이었다. 

작전명은 X-RAY 였다. 


그렇게 결송됐던 이 첩보부대원들은 첩보활동을 위해 영흥도에 상륙, 그곳에서 무려 한 달간의 정보를 수집에 들어간다.

임무는 은밀히 진행됐다. 적진 한복판, 목숨을 보장할 수 없었던 임무였다.


여러 가지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꾸준히 정보를 수집해 사령본부로 전달했고 이 정보들은 인천상륙작전을 시행하기 위한 기틀이 된다.

그렇게 한 달간의 작전 기간이 흐르고, 인천상륙작전이 시작되기 하루 전인 9월 14일, 그들에게 마지막 명령이 하달되었다.


무사 귀환하라는 명령이었다.


귀환 명령이 떨어짐과 동시에 서둘러 철수 준비를 시작한 부대원들은 한 달간 무사히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제 귀환만 잘 이뤄진다면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러나 수십여 발의 포탄과 총탄이 그들을 향해 날아왔다. 그들의 철수 상황을 눈치 챈 북한군의 기습이었다. 부대원들의 눈에는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백여 명의 북한군이 보이기 시작했다. 


아군의 수는 불과 열댓 명에 불과했지만 그 수십 배에 달하는 적군의 수로 봤을 때 이대로 포위된다면 부대원 전체가 포로로 잡힐지도 모르는 절체절명의 상황이었다.


바로 그 때, 모두 모트에 올라타라, 우리가 엄호하겠다. 


시간을 벌겠다며 앞으로 내달렸던 두 명의 군인, 임병래 중위와 홍시욱 하사였다. 

그들은 각각 소총 하나만을 손에 쥔 채, 자신들을 향해 바른 속도로 다가오는 백여 명의 북한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적의 상륙 시간을 저지하며 나머지 부대원들이 철수 보트에 몸을 올리는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이제 임병래, 홍시욱 두 사람만 승선한다면 모든 상황이 종료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러기 전에 이미 적군에게 포위되어 버린 두 사람이었다. 백여 명의 적군을 단 두 사람만의 힘으로 뚫고 보트로 돌아온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천상륙작전이 내일이다. 만약 여기서 우리가 생포된다면 이 작전은 탄로날지도 모른다. 그렇게 둘은 자결하였다. 생포되어 모든 고문을 받다가 혹시라도 자신들의 인천상륙작전에 대한 어떠한 정보라도 유출할까 걱정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두 사람은 한날 한곳에서 자결로 생을 마감하며 순국한다. 그들의 나이는 불과 29세와 22세였다. 그들이 쓰러지고 24시간 후 시작됏던 인천상륙작전, 결과는 모두가 알듯이 대성공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 두 사람이 스스로를 희생하지 않고 적군의 포로가 되었더라면 어떠 했을지 상상하기도 싫다. 분명 실패했을지도 모른다. 

당시 X-Ray 작전 지휘관 함명수 소령이 했던 말씀이다.

임명래 대원이 약혼녀가 있다는 말을 듣고 작전에서 빼려고 했는데도 기어코 자기도 넣어 달라고 했습니다. 내색 하진 않았지만,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다고 합니다.

정말 모든 것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서 희생했던 그들이었다.


당신은 이제 인천상륙작전하면 어떤 것이 먼저 떠오르는가요? 맥아더 장군의 업적, 연합군의 도움, 여러가지들이 인천상륙작전의 승리로 이끌 수 있는 이유였지만 진짜 이유는 그곳엔 우리의 기억속에 사라졌던 그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 출처 : 피키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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