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대의 휴양지는 아름다움이 숨쉬는 섬, 제주도 입니다.
모든 것들이 생기 넘칠 것만 같은 아름다운 이곳이지만, 이곳에 죽음의 그림자가 덮쳤다. 당시 아름다운 섬 제주도는 사라졌고, 모든 것은 천천히 죽어갔다.
무려 제주도 사람의 1/3이 차가운 주검이 되었고, 시체 썩는 냄새는 온 섬을 뒤덮었다.
1795년에 제주도에 들이 닥친 살인적이 가뭄이 만들어 냈던 전대미문의 아사 사건이었다. 아사란 굶어 죽는다는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대로라면 제주도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사라질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당시 나라의 통치자였던 정조는 급히 어명을 재려, 제주도 백성을 구제할 구휼미를 보낸다. 하지만 쌀을 실은 대부분으 배가 제주도에 채 닿기도 전에 바닷속으로 침몰해 버리는 안타까운 상황이 발생한다. 예상치 못한 기상이변이 발생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구휼미마저 가라앉아 이제 나라에서 조차 그들을 구할 방도가 더 이상 없던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그런데 제주도 백성들에게 쌀이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져 왔다.
모조리 수장돼 버린 쌀이 어찌 그들에게 도착할 수 있었단 말인가?
믿기 힘든 일이 일어났다. 사라져 버린 쌀이 제주도에 도착을 했다.
사라졌던 쌀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다. 이것은 단 한 사람에 의해 일어난 일어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제주도 최고의 거상이자, 조선의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재력가였던 여인, 조선의 여성 CEO 김만덕이었다.
김만덕은 십 대에 부모를 여의고 기생으로 살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내지만, 그러한 아픔을 이겨내고 23살의 나이에 무역업을 시작했다.
불과 몇 십 년 만에 조선 제일의 재력가로 성장했던 조선의 신여성인 김만덕은 죽어가는 제주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큰 결심을 내린다.
돈이 아무리 중하다고 한들 사람 목숨보다 중하겠냐는 생각이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전 재산을 내어 제주도민을 살릴 쌀을 구하는데, 그 규모는 약 500석이었다. 이는 현재 시가로 700억에 해당하는 어마어마한 금애기었다.
그녀는 그렇게 구한쌀로 나라이 구휼을 지원하며 구호 활동을 펼친다.
김만덕의 희생은 그렇게 죽어가던 제주도를 살리며, 그 곳에 한 줄기 빛이 된다.
여기서 만약 김만덕이 활약하지 않았다면 제주도는 어떻게 되었을까?
이 질문의 답을 알고 있었던 왕, 정조는 사람을 보내 김만덕의 소원으 친히 전할 것을 명한다. 대부호였던 그녀의 소원은 너무나 단촐했다. 어떻게 보면 별거 아닐 것 같은 그녀의 소워이었다.
한양에 가서 임금님을 한 번 뵙고, 금강산 구경을 한 번 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보면 벼것 아니 것 같은 그녀의 소원은 당시로선 불가능에 가까웠다.
출륙금지령이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제주도민들은 법적으로 섬을 벗어날 수 없었던 신분이었다. 게다가 평민 여성이 임금을 대면한다는 것과 거기에 성공항 양반들만 할 수 있었던 금강산 유람까지 하나는 것은 역사상 그 전례를 찾아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정조는 그런 논란쯤이야 가볍게 무시해버리는 파격적인 명령을 내린다.
김만덕에게 의녀반수라는 여성으로서 최고 벼슬을 내려 왕을 만날 수 있는 명분을 만들고 금강산 유람에 대한 모든 지원을 약속했다. 그녀가 지나가는 모든 시설의 편의를 제공했다고 한다.
이렇게 제주도를 살린 빛이 되어 평민 여성 최초로 앙을 만나는가 하면 금강산 유람까지 경험하는 소원을 이룬 김만덕은 이 후 제주도에서 여생을 보내며 생을 마감한다.
당시 김만덕의 의행이 진실로 큰일이었다는 것은 왕이 직접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것뿐만 아니라, 그녀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만들라고 지시했다는 일화가 말해주고 있다.
조선시대에 여성들의 성공은 힘들었던 그 사회에서 시대를 읽는 눈으로 최고의 부를손에 넣었지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위하며 진정한 의미의 부가 무엇인지 말해주었던 그녀의 정신은 그렇게 수백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어져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나눔문화를 만들어 내고 있다.
점차 공동체보단 자신만을 위하며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서 그녀의 이름을 우리가 기억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 출처 : 피키캐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