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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안중근

by Wa_rranty 2017.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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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이야기는 안중근 선생님에 대해서 입니다.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안중근을 대신하여 진심으로 사죄한다. 이를 갚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1939년 경성에서 이토 히로부미를 공양하는 사찰에 찾아와 안주근의 행적을 사죄하는 의문의 조선인 남자가 있었다.

원래는 을미사변 때 순국한 조선인들을 모시기 위한 재단이었으나 일제가 개조하여 이토 히로부미를 공양하는 사찰로 만들어 버린 곳이 바로 서울의 박문사이다.

 

그의 일은 곧 당시 신문에 대서 특보된다.

1939년 10월 16일 경성일보에서 그는 이토 히로부미의 초상화 앞에서 안중근을 대신하여 온 마음을 다해 사죄했다라고 보도하였다.

 

그리고 같은 신문에 실렸던 또 다른 기사 하나에는 그는 사찰 방문 후 이토의 아들을 찾아가 그에게 안중근의 행도을 깊이 사죄했다라고 적었다.

 

돌연 나타나 민족의 영웅인 안중근 의사의 업적을 두고 사죄하러 다니는 사내에 대해서 모든 조선인들이 그의 친일적 행동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특히 백범 김구 선생님은 그 사내의 행동에 크게 분노하시며 사내를 맹렬히 비난했다.

민족반역자로 변절한 그를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라고 중국에 부탁했지만 거절당하였다.

 

모든 조선인들은 물론이고 김구 선생님까지 분노에 차게 만들었던 그 사내는 도대체 누구인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진심으로 사죄합니다. 이를 갚기 위해서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그는 사찰 방문 후 이토의 아들을 찾아가 그에게 아버지의 행동을 깊이 사죄했다.

그날 기사에 실렸던 주인공은 안중근 선생님의 둘째 아들인 안준생이었다

 

그날 이후 그에게 붙었던 별명은 호부견자이다.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 개 같은 자식, 친일파 안준생은 그렇게 탄생했다.

영웅의 아들은 어째서 친일파가 되어버린 것이었을까?

 

1909년 역사적인 하얼빈 의거로 민족의 독립 정신을 널리 알렸던 안중근 의사의 죽음이 있었다. 당시 3살이었던 안준생은 그렇게 아버지를 잃었다.

안중근 의사의 부인 김아려 여사, 첫째 아들 안분도, 둘째 아들 안준생은 그렇게 안중근 의사와 이별하였다.

 

그때부터 그를 따라다니던 또 다른 이름은 테러리스트의 아들이었다. 일본인들이 가장 존경하던 인물을 죽인 테러리스트의 가족이라는 이름, 안중근 의사의 유족들의 삶은 일본의 감시와 핍박을 피할 수 없었다.

 

비록 그의 아버지는 민족의 영웅이었지만, 영웅의 가족들을 기억해 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자신의 친형이 독이 든 과자를 먹고 죽는 일까지 겪은 안준생이었다.

 

그렇게 아무도 알아주는 이 없는 나라 잃은 영웅의 아들은 억압과 궁핍 속에서 살기 위해 발버둥치지 않는다면 언제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성장한다.

 

어떤 이들은 당시 실렸던 기사는 일제가 만드러 낸 일종의 선전용 연극이었음을 주장하며 당시 안준생의 행동이 자신과 가족들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던 선택이었다고 말한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이들은 무슨 이유에서든 일제의 계략에 동참하며 민족반역적 행위를 한 것은 사실이며 이것은 안중근의 아들로서 절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라며 그의 친일 행위를 맹렬히 비난한다.

 

영웅의 아들로 태어나, 반역자란 이름으로 평생을 살아야 했던 안준생을 우리는 어떻게 바라봐야 할까? 아버지는 영웅이 되셨지만, 난 늑대 우리에 던져졌을 뿐이었다. 내가 아첨을 하든 사죄를 하든 네 발로 기어가든 난 내 목숨을 지켜야 했다. 내가 살아남은 게 잘못인 건가 하는 생각이든다.

 

- 출처 : 피키캐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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