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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선

by Wa_rranty 2017. 1.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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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의 이름 : 이선


대표적인 예로, 하루는 사도(이선)가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스스로 결정을 내려 영조에게 보고했더니, 영조는 "네가 왕이냐, 네가 뭔데 결정을 내리는 거냐"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에, 사도가 다른 일로 신하들과 회의를 하고 영조에게 어떻게 해야 할지 물으니, 영조가 답하길 '네가 그러고도 세자냐, 이런거 하나 처리를 못 해!"라며 또 화를 냈다고 합니다.


  

이렇게 해도 화를 내고 저렇게 해도 화를 내는 영조의 모습에 사도가 점점 아버지를 무서워하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죠. 급기야 청심환을 먹지 않으면 영조를 대면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단절된 대화, 청심환을 먹지 않으면 대면 불가능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사도는 급기야 미쳐버리면서 다양한 발작 증세를 보입니다


  

가장 대표적인 발작은 바로 '의대증'입니다. 의대증이란 옷을 입는데 불편함을 겪는 일종의 강박증입니다. 사도는 궁녀가 옷을 입힐 때 살에 옷이 닿으면 가차 없이 칼로 베어 죽였다고 합니다.


  

또한, 발작을 일으킨 사도(이선)는 후궁의 얼굴을 주먹으로 구타했으며 후궁이 낳은 사도 자신의 아이를 연못에 던지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본 부인인 혜경궁 홍 씨에겐 바둑판을 집어 던졌다고 합니다.


  

아들의 기행을 보던 영조는 조용히 사도이선을 불러 그러지 말라고 타일러 보았지만 그 대화를 마지막으로 둘의 사이는 완전히 단절되었고, 몇 년 뒤 이선은 뒤주에 갇혀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사도(이선)의 죽음의 결정적인 원인은 무엇이었을까요? 근본적인 원인은 사도의 기행에 있었지만, '붕당'이라는 정치적 상황이 큰 오해를 낳게 만들었습니다.


  

사건의 발단은 영조 31년, 전라도 나주에 영조를 비방하는 글이 붙었는데 이때 대리청정하던 사도가 이러한 문제를 일으킨 '소론' 출신들에게 솜방망이 처벌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에 당시 집권세력이기도 하고 소론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노론 측은 지금까지 사도가 저지른 기행을 '비행10계'를 이유를 들어 영조에게 세자의 폐위를 주장한 것입니다.


  

정치적 위기에 있던 사도이선는 안타깝게 여기서 발작을 일으키며 입에 담지 말아야 할 말을 합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칼을 가지고 와서 아버지를 아모리(어찌어찌) 하고 싶다'라고 말한 것입니다.


  

즉, 아버지 영조를 칼로 죽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이 말이 어머니 영빈 이씨에게 들어가고, 영빈 이씨는 이 말을 다시 영조에게 전하면서 희대의 비극이 그 절정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더 이상 부자관계가 아닌 왕과 신하의 관계로 사도를 바라 보게 됩니다. 그리고 영조는 아버지 숙종의 묘를 찾아가 역적을 죽이겠다고 굳은 다짐을 하게됩니다.


  

그 후 영조는 사도를 불러 자결을 명합니다. 사도(이선)는 빌고 또 빌었으나 영조가 결국 들어주지 않자, 머리를 벽에 부딪치고 끈으로 목을 매며 자결하려 했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했습니다.


  

이런 광경을 보다 못한 영조는 결국 신하를 시켜 뒤주에 사도를 가둬버립니다. 그리고 뒤주의 틈 사이로 물과 부채를 주어 생명을 부지하게 했던 신하들의 접근을 일체 금지시켜버립니다.


  

이 '뒤주'라는 표현은 혜경궁 홍 씨의 한중록에 표기되어, 현재까지 알려져 있는 것입니다. 사실 조선왕조실록에는 뒤주라는 표현이 없고 정조실록에는 '일물'이라 하여 하나의 물건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결국에 뒤주에 갇힌지 8일이 지나고, 사도는 혀를 깨물고 탈진해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조선왕조 500년사를 통틀어 최대의 비극 스캔들이라 불리는 '사도세자의 죽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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