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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사도

by Wa_rranty 2017. 1.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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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 3회에 걸쳐 영화로도 흥행 했던 사도(송강호, 유아인 주연)의 비극적 이야기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첫 번째 이야기로 사도의 아버지인 영조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드리려고 합니다, 영조를 한 마디로 정리하자면 바로 콤플렉스의 왕이라 할 수 있습니다. 크게는 두 가지로 나눠볼 수 있겠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콤플렉스는 '천민 출신의 왕'이라는 타이틀입니다.

조선왕조 500년을 통틀어 천민출신으로 왕위에 오른 유일한 사람이 바로 영조입니다. 영조의 어머니는 무수리 출신으로 숙종의 성은을 입어 후궁이 되어 영조를 낳았습니다.


  

영조의 두 번째 콤플렉스는 '형을 죽이고 왕이 된 왕'입니다.

선왕이자 이복 형이었던 경종이 몸이 아플 때, 쾌차를 기원하며 게장과 감을 선물 했는데, 그것으로 경종이 매우 앓다 죽게되면서 자연스레 굴레를 뒤집어쓰게 된 겁니다.


  

천민 출신에다가 형을 죽인 왕이라는 오명을 덮은 채 왕위를 시작해야했던 제 21대왕 영조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영조의 재위기간은 무려 51년 7개월입니다. 역사상으론 고구려 장수왕과 더불어 가장 오래 집권한 왕이기도 합니다. 너무 오래 살아서 아들이 아닌 손자가 왕이 되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유명한 정조입니다.


  

그럼 영조는 어떻게 이렇게 오래 살았을까요?

영조는 어려서부터 천민들하고 살아서, 들판에서 뛰어 놀았고, 소식을 했으며, 채식주의자였다고 합니다. 당시 천민들의 일상이었습니다.


  

그리고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했다고 합니다.

심지어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인 날에도 규칙적인 식사를 했다고 합니다.


  

또한 평생 술을 안 마셨던 것으로도 잘 알려진 영조입니다.

그 이유는 '백성이 먹을 식량을 가지고 어떻게 술을 마시냐'고 노하며 금주령을 내렸다고 하니, 애민의 마음이 어느정도 였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영조의 업적을 살펴보겠습니다.

영조의 첫 번째 업적은 바로 '탕평책 실시'입니다.

당시 집권 세력인 노론, 소론에 쏠리지 않은 중도파들만 기용하여 조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습니다.


  

탕평책을 쓴 본질적인 이유는 바로 '붕당정치'의 뿌리를 뽑고자 함이었습니다. 당시 조선의 정치를 살펴보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져 매일 당파 싸움을 일삼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뿌리인 사원을 철폐하고, 노론과 소론을 대변하는 '사림'이라는 존재를 부정 했다고 합니다.('사림'이란 쉽게 말하면 정치하기 이전의 안철수 의원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리고 절대 붕당정치를 하지 말라는 경고로 성균관 앞에 '탕평비'를 세워 노론과 소론에 싸우지 말고 조용히 하라는 압박을 가하기도 했습니다. 

(정조시대의 정치적 안정의 밑거름을 쌓은 영조입니다.)


  

영조의 업적 두 번째는 '근검 절약'입니다.

일단 영조 본인이 소식하고, 채식하며, 의복도 본인 스스로 꿰메어 입는 등 검소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신하들도 자연스럽게 따라야 했습니다.


  

그리고 당시 조선시대 여인들은 '가체'라는 것을 부와 미의 상징으로 머리에 쓰고 다녔는데, 비싼 것은 소 한마리, 집 한채 값을 넘었다고 합니다.


  

더구나 욕심에 따라 자꾸만 커지는 가체로 인해 목이 꺾여 죽는 웃지 못할 일들이 생기니, 이에 영조는 가체 금지령을 내리고 족두리로 대신하게 해 사치를 줄이고자 유도했습니다. 근검절약의 표본이 된 영조시대입니다.


  

영조의 업적 세번째, 바로 '애민 군주'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는 영조는 아들 사도를 죽인 싸이코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와 달리 애민의 실천적 사례들이 아주 많이 있습니다. 첫 번째 예로 영조는 가혹한 형벌들을 폐지했습니다. 조선시대에는 사건이 벌어져 추국(사건 조사)에 들어가게 되면 항상 가혹한 형벌이 뒤따랐습니다.


  

추국은 태형(작은 곤장) - 장형(큰 곤장) - 도형(감옥살이) - 유형(귀향) - 사형의 순서로 '하나의 코스' 처럼 진행되었습니다.


  

먼저 태형부터 시작되는데, 보통 사람이 죽을 때 맞아서 죽는 것이 아니라, 태형을 집행하는 곤장이 더러워져 2차 감염에 의한 죽음이 많았다고 합니다. 즉, 태형 맞고 옥살이하고 유배가면 감염으로 죽는 코스라는 겁니다.


  

이외에도 바닥에 유리조각을 깔고 그 위에 사람이 무릎을 끓게 한 후 무릎 위에 돌을 올려 고통스럽게 자백을 받아내는 압슬이라는 어마무시한 형벌이 있었고, 모두가 잘 알고 계시는 능지처참이라는 극형도 있었습니다. 쉽게 말해 사람의 팔다리를 묶어 놓고 머리와 가슴을 제외한 부분을 칼로 잘라 포를 뜨는, 정말 상상조차 하기 싫은 형벌이었던 겁니다.


  

백성을 사랑한 영조는 이와 같은 잔혹한 형벌들을 법으로 금지 시킴으로써, 진정한 애민을 실천한 군주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조선시대 최고의 법전이었던 '경국대전'을 고쳐 '속대전'을 편찬 하였는데요, 이는 경국대전이 이미 수백년 전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당시 시대 상황과 맞지 않는 것이 많아 그에 맞게 다시 편찬하였으며, '동국문헌비고'라는 우리나라의 문물 제도를 수록한 일종의 백과사전도 편찬하였습니다. 나라와 백성을 올곧게 이끌고자 노력했던 영조의 노력이 짐작이 가실거라 생각합니다.


  

이렇듯, 백성을 위한 애민의 정치를 펼쳤던 영조가 왜? 유독! 그의 아들인 사도세자에게는 그렇게 엄격하게, 무섭게 대해야 했는지에 대해선 다음 2탄에서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 출처 : 네이버 영화 '사도',    글 : 설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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