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을 강화하고 애민을 실천하며, 가장 장수했던 왕은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왕, 영조입니다.
하지만 어쩌다 자식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지금부터 살펴보겠습니다.
중전들로부터 자식을 얻지 못한 영조! 하지만 그의 나이 41살에 후궁인 영빈 이씨로부터 자식을 얻었으니 그가 바로 '이선', 사도세자였습니다. (맏아들인 형 효장세자는 10세 때 요절하고 말았습니다.)
요새도 마흔둥이(마흔에 얻은 자식)라고 하면 애지중지하는데, 그 당시 마흔둥이면 지금의 환갑 나이에 자식을 얻은 거나 마찬가지여서, 영조 입장에서는
너무나도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게다가, 사도세자(이하 사도)는 어려서부터 그 총명함이 남달라 매우 영특했다고 하는데요, 잘 알려지지 않은 사도의 영특함을 몇 가지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3세 때부터 한자를 읽고 글씨를 쓸 줄 알았다고 합니다. 이에 많은 신하들이 사도의 글씨를 얻으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기까지 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일화는 역시 3세 때, 누군가 '세자'라고 물으면 본인을 가리키고, 또 '왕'이라고 물으면 아버지 영조를 손으로 딱 가리켰다고 합니다. 걸음마도 제대로 못한 시절이었는데 영조는 무척 대견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4, 5세 시절엔 사도세자가 밥을 먹다가 영조가 '선아'하고 부르니, 먹던 밥을 뱉으며 '예! 전하!'라고 했는데, 왜 밥을 뱉었냐고 이유를 물으니 '유교 경전에 적혀있어 그리 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영조로서는 어린 사도세자의 이러한 행동 하나하나를 보고 무척이나 기뻐했다고 합니다.
천민 출신의 왕이라는 콤플렉스 때문에 신하들이 본인을 업신여긴다고 생각했던 영조입니다. 그렇기에 똑똑한 사도가 왕실의 권위를 제대로 세워줄 수 있겠다는 기대를 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영조의 기대는 사도가 15세가 되면서 산산히 부서져 버렸습니다. 우선 사도가 너무 잘 먹어서 몸이 마치 오늘날의 씨름선수처럼 비대해졌다고 합니다.
또 힘도 무척이나 세서, 당시 무관들도 잘 들지 못하던 청룡도(칼의 한 종류)를 휘휘 돌리며 말을 탈 정도였다고 합니다. 또한 '무예신보', 지금으로 말하자면 특공무술 교본도 편찬했다고 전해집니다.
쉽게 말해 초등학교 땐 전교 1등 하던 아이가 중학교에 가자, 공부는 안 하고 격투기만 하겠다는 것이니, 문치주의를 통해 왕실의 권위를 세워주리라 기대했던 영조로서는 낙담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사실, 이때 영조가 마음을 조금만 열어 사도를 불러다 놓고 '우리는 천민 출신이고, 조선은 문치국가이니 그러지 말고 공부하자'라고 좋게 타일렀더라면, 아마 사도는 미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허나 영조는 앞서 말씀드렸듯 본인에게 무척 엄격한 사람이어서, 자식 교육에도 정~~~말 엄격했다고 하는데, 바로 이 점 때문에 사도가 삐뚤어졌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불어 사도가 삐뚤어지게 된 큰 원인 중 하나는 태어남과 동시에 세자로 책봉되어 부모가 아닌 유모들의 손에 자란 것입니다. 이것이 크게 한 몫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 유모들은 경종의 유모들이었는데, 이들은 영조가 경종을 죽였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들의 입장에선 자식 같은 경종을 죽인 영조의 아들이 마냥 예뻤을 리 만무했을 것입니다.
유모들은 사도에게 어려서부터 공부가 아닌 병정놀이, 칼싸움 같은 것을 시켰는데, 이로 인해 자연스럽게 공부와 멀어지게 했다고 합니다. (이 내용은 사도의 부인이 집필한 '한중록'에도 나와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은 점점 더 심해졌는데요. 영조는 사도가 15세가 되던 해부터 '대리청정', 이른바 왕 수업을 시켰고 이후 두 부자의 관계는 완전히 무너졌습니다.